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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화
거리를 가득 메웠던 인파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한 새벽 시간.
슬슬 한가해지기 시작한 번화가와 달리 블랙 마켓이 자리한 뒷골목은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영업시간이었다.
비록 지난 의문의 습격 이후로 손님의 수가 뚝 줄기는 했어도, 블랙 마켓을 찾는 이들은 여전히 있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구하기 힘든 것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는 이들은 언제고 있었으니까.
정수아는 스노우와 합류하자마자 빠르게 움직였다.
나연성을 비롯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숨겨왔던 최측근들을 데리고 블랙 마켓을 급습했다.
이전 닉스의 습격 이후로 나름대로 경비를 강화했던 블랙 마켓이었지만, 이미 내부의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는 정수아를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애초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블랙 마켓 측의 헌터들은 모두 애송이나 다름없었기에 습격이 시작되자마자 제 살길을 찾아 도망치기 바빴다.
그나마 장웨이와 야마모토 측에서 파견한 중국과 일본의 헌터들이 열심히 항전했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비밀통로 따위를 이용해 공격해오는 정수아 일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제대로 된 대응은커녕 속수무책으로 뚫리기만 하는 수비에 결국 엉덩이 무거운 S랭크 헌터들이 몸을 일으켰다.
“쯧… 도망쳤던 계집애가 돌아왔나?” “흥. 이제 와서 돌아와봤자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쓸데없는 짓을 벌였군.” 파죽지세로 블랙 마켓 내부를 정리하던 정수아의 앞에 두 사내가 나타났다.
각각 일본의 S랭크 헌터인 히토시와 중국의 S랭크 헌터 조충이었다.
“호오…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듣던 대로 제법 아름다운 계집이군. 그냥 죽이기에는 아깝겠는걸?” “…그것보다 히토시. 상부에서 연락이 왔다. 감히 우리 사업장을 공격해? 한동안은 서로 페어플레이하자던 것 아니였나?” “하. 이 바닥에 페어플레이 같은 게 어디 있지? 애초에 먼저 뒤통수를 친 건 네놈들이지 않았나?” “그건 분명 우리 쪽 잘못이 아니라고 했을 텐데!” “그렇다면 이쪽 역시 우리 쪽 잘못이 아닌 거겠지.” “…이 섬나라의 저능한 원숭이 놈이!” 거만한 태도로 모습을 드러낸 둘은 정작 습격자인 정수아 일행에게는 별다른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기 바빴는데, 눈앞에 정수아 일행의 존재만 없었다면 당장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어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그런 둘의 모습에 정수아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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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비슷한 로투스홀짝 수준들끼리 잘들 노네요.” “…모른 척해주고 있을 때 도망가지 그랬나? 같은 업계 종사자로서 네년 처지가 딱해서 말이다.” “어머? 적한테 그런 배려를 베풀어주시는 건가요? 참 자비롭기도 하셔라.” 짐짓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정수아의 모습에 조충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동안 네년을 잡지 못해서 안 잡은 게 아니다. 네년 정도야 대업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기에 그저 무시하고 있던 것뿐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천지 분간을 못 해서야… 두 번째 배려는 없다.” “킥킥… 아이고, 무섭기도 해라~ 그럼 계속 모른 척해주시겠어요? 아니면 두 분이 계속 싸우고 계셔도 괜찮은데. 그동안 저는 제 볼일이나 볼게요.” “하핫! 이거, 듣기보다 더 건방진 년일세? 오거득 그 돼지 놈이 왜 그리 환장하는지 알겠군. 저런 년이 또 아래 깔리면 맛깔나게 울어준단 말이지.” 한차례 비릿하게 웃은 히토시가 음흉한 눈빛으로 정수아를 훑었다.
“어때? 지금이라도 얌전히 항복한다면 오픈홀덤 하다못해 죽기 전에 천국을 맛보게 해주마?” “어머? 설마 당신이요? 풉….” 정수아가 흘깃 히토시의 다리 사이를 바라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히토시가 더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 높여 웃었다.
“하하! 이거 완전 골 때리는 년이군! 좋아, 좋다! 네년에게는 천국이 아닌 지옥을 보여주마. 차라리 죽여달라 할 때까지 내 밑에서 굴려주겠어!” 한차례 웃어 재낀 히토시가 돌연 표정을 고치며 조충을 바라보았다.
“어이, 중국 놈. 일단 우리끼리 다툼은 조금 미루자고. 어쨌든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습격자를 처리하는 일이잖냐? 우선 눈앞의 저년부터 조금 손봐주는 게 어때?” “…….”
조충의 시선이 세이프게임 흘깃 정수아를 향했다.
묘한 눈웃음과 함께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조충이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적어도 고통받을 일 없게 깔끔히 죽여주마…. 세이프파워볼 그리고 네놈. 이번 일만 끝나면 네놈만큼은 반드시 내가 죽여주마.” “흥! 웃기는 소리!” 앙숙이나 다름없던 두 S랭크 헌터가 잠시지만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정수아가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어머. 결국, 파워볼사이트 이렇게 돼버렸네요? 아쉬워라. 그냥 조용히 넘어갈까 싶었는데.” 한차례 중얼거린 그녀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한 두 헌터를 보고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니.”
나지막이 내뱉은 목소리와 함께 새로운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본녀는 너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허락한 적이 없다만.” 사뿐히 세 사람 사이에 내려선 여인이 가볍게 히토시와 조충을 살폈다.
그 청명한 푸른 눈과 마주한 두 사람은 상황도 잠시 잊고서 멍청하게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경국지색.
그 말조차 부족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아름다운 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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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고 있는 분홍색 트레이닝복에도 불구하고,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기품있는 미녀.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미녀에 두 사람이 무심코 꿀꺽- 침을 삼켰다.
“그래서 본녀의 상대는 이 둘인가?” “네, 언니. 부탁드려요.” “굳이 부탁할 필요 없다. 처음부터 본녀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다만, 그 ‘언니’라는 호칭은….” “아이, 참! 이번 일만 끝나면 제가 맛있는 거 잔뜩 사드릴게요!” “…본녀가 부군도 아니고, 설마 먹을 거로 넘어갈 것 같은가?” “반짝이는 보석이라도 한가득 사드릴 테니까요! 일단 저는 바빠서 이만!” 그리 내뱉은 정수아가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연성이나 다른 수하들과 함께 자리를 떠나갔다.
제 할 말만 하고서 잽싸게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에 스노우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볍게 고개를 가로젓는 그녀를 따라 새하얀 머리카락이 살랑이며 나부낀다.
그 광경에 멍청히 그녀를 바라보던 히토시와 조충이 헉-하고 헛바람을 삼켰다.
“자, 그래서 거기의 두 놈. 둘에게는 꽤나 기대하고 있다.” 무표정한 얼굴로 둘을 돌아본 여인. 스노우가 스르릉- 허리춤에 아무렇게나 메여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검술은 처음이다만, 부디 본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으면 좋겠구나.” 담담히 내뱉은 그녀가 곧 두 사람에게로 몸을 날렸다.
검술이라고는 전혀 할 수 없는, 엉성하기 그지없는 단순한 공격이었음에도 히토시와 조충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스노우에게 이미 단단히 홀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S랭크의 헌터인 히토시와 조충은 한동안 스노우의 훌륭한 교재가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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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정수아가 사용하던 집무실에서 그녀를 밀어내고 현 블랙 마켓의 사장이 된 오거득이 짙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쯧… 영 시원치 않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군.” 외부의 힘까지 빌리며 어렵사리 손에 넣은 블랙 마켓이 과거와 달리 주춤거리니 그의 기분이 그리 썩 좋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줄타기는 적당히 하고 진작에 한쪽과 손을 잡았어야 했나?” 뒤늦게 그런 후회도 들었지만, 이제 와서 어쩔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이제는 어느 한쪽과 손을 잡는다고 하더라도, 과거와 같은 조건으로 손을 잡을 수도 없을 터.
괜히 손해만 잔뜩 본 기분에 오거득은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그래… 계속 이대로 눌러앉았다간 정말 죽도 밥도 안 되겠지… 적당히 한쪽 손을 들어줘야겠어.” 손을 잡는다면 어느 쪽이 좋을까?
역시 야마모토 형제보다는 뒷배가 탄탄한 중국 쪽이 좋을 것이다.
“손은 잡더라도 일단 최대한 버티면서 몸값을 올려야겠지.” 이전에도 양쪽과 줄다리기를 하면서 버티다가 큰 손해를 입은 오거득이었지만, 그리 개의치 않았다.
애초부터 오거득의 인생 자체가 줄다리기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랬으며,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그것보다 참 아쉽단 말이지… 수아 그년을 놓친 건….” 당장 오거득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너무나 아쉬웠다.
항상 그녀를 볼 때마다 참 탐이 났었는데.
“그년 그것 참 예쁘게 잘 컸지. 설마 그렇게 놓칠 줄이야. 아깝게 됐어.” 쯧- 짧게 혀를 찬 오거득이 후-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손을 잡는 조건으로 수아 그것만큼은 반드시 잡아 와야 한다고 할까? 가능한 얼굴에 기스는 안 나면 좋겠는데 말이지.” 무엇을 상상한 것인지, ‘흐흐-’ 음흉한 웃음을 흘린 오거득이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정수아 그것을 떠올렸더니,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다.
“오늘은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안마담네로 갈까? 아니면 소희네로 갈까?”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었지만, 오거득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저런 사소한 것 따위보다야 지금은 당장 닳아 오른 몸을 해결하는 게 더 급했으니까.
이렇듯 블랙 마켓이 과거와 달리 점점 몰락해 가는 이유는 단순히 야마모토 형제나 장웨이들의 탓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오거득 자체가 절대 훌륭한 사장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막 오거득이 방을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돌연 쾅! 하고 집무실의 문이 터져나갔다.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오거득이 재빨리 몸을 숙였다. 나름 B랭크의 헌터다운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이, 이게 무슨…?!” “어머? 못 보던 사이 얼굴에 더 개기름이 끼었네요. 훌륭한 개돼지가 되어있어요.” -안녕하세요, 아저씨.
담담히 들려온 목소리에 오거득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의 눈앞에 화사한 미소를 지은 정수아가 있었다.
언제나처럼 매혹적인 향을 흩뿌리면서.
“수, 수아야?”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니, 이제는 오 사장님이라 불러드려야 하려나?” 전혀 상상도 못 한 정수아의 등장에 오거득이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네, 네가 여긴 어떻게?” “항상 나다니던 곳인데, 당연히 길 따라 들어왔죠. 뭘 어떻게 왔겠어요?” “겨, 경비는 어쩌고?” “어머어머. 뒷세계 놈들한테 뭘 기대하세요? 적당히 위협하니까, 알아서 살길 찾아 도망가던걸요? 그러게 평소에 신용할 수 있는 사람을 좀 구해두시라니까.” 미소만큼이나 화사한 목소리로 산뜩하게 내뱉는 정수아의 모습에 오거득이 침음을 삼켰다.
그가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뒤, 뒤쪽에 비밀통로가 있다…! 잠깐의 틈만 있으면…!’ “아, 혹시 비밀통로를 생각하시는 거라면 포기하시는 게 좋아요. 미리 사람을 보내놨거든요? 설마 이 집무실의 원래 주인이 저라는 걸 잊으신 건 아니죠?” 슬며시 내뱉는 정수아의 목소리에 오거득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런 오거득의 모습을 피식이며 비웃은 정수아가 재차 산뜻하게 말을 이었다.
“애초에 제 앞에서 도망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아저씨 주제에?” 나긋나긋 내뱉는 목소리와 달리 정수아에게서 섬뜩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S랭크의 헌터가 내뿜는 기세에 B랭크인 오거득은 감히 저항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제, 젠장! 쪽바리놈들이랑 짱깨놈들은 도대체 뭘 하는 거야!? 보호비 명목으로 뜯어간 돈이 얼만데!” “아, 그 S랭크들이라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요. 저희 언니가 상대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이것저것 실험할 게 많은 모양이던데… 음, 금방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아요.” 피식- 가벼운 웃음을 흘린 정수아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성큼 다가오는 정수아의 모습에 오거득이 주춤거리며 바닥을 기었다.

“수, 수아야! 오해다! 내가 옛날부터 너를 얼마나 예뻐했었는데…! 알지 않느냐!?” “네, 잘 알고 있죠. 예전에 아버지 따라오셔서 한 번씩 사탕도 쥐여주시고 그러셨잖아요.” “그, 그래! 내가 너희 아버지랑 호형호제하던 사이야! 그러니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보거라! 다 오해야! 나는 단지…!” “저를 얼마나 예뻐하셨으면, 항상 볼 때마다 침을 질질 흘리는지… 저도 아저씨 마음 잘 알고 있답니다.” “…그, 그것은! 오, 오해…!” 쾅- 정수아가 발을 굴렀다.
눈 깜짝할 새 제 가랑이 사이에 내려 찍힌 정수아의 구두 굽에 오거득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동안 아버지 친구라고 너무 오냐오냐해드린 것 같아요. 진작 말 잘 듣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화악- 한순간 코끝으로 스며드는 달콤한 향에 오거득이 ‘히익-’ 비명을 내질렀다.
달콤한 향에 뇌가 녹는 거 같았다.
한순간에 시야가 아득해져 간다.
“성질 같아서는 확- 회를 쳐버리고 싶은데… 아무래도 이것저것 들을 게 많다 보니…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편하게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수, 수아야아…!” 오거득이 뒤늦게 애원하듯 정수아를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코끝으로 스며든 달콤한 향은 이미 그의 몸 깊숙이 뿌리내렸다.
“흐, 흐어어─….” 잠깐 사이 오거득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헤- 벌린 입술 사이로 줄줄 침이 흘렀다.
그런 오거득의 모습을 잠시간 무심하게 바라보던 정수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바깥 상황은요?” “뒷정리 정도만 남았습니다. 스노우 님이 아직 즐기시는 것 같지만, 곧 끝날 거라 생각됩니다.” 슬며시 방안으로 들어서며 나연성이 담담히 답했다.
그의 시선이 흘깃 오거득에게 닿았다가 재차 정수아를 향했다.

“…언니의 일이 끝나면 바로 알려주세요. 그리고 이참에 내부 정리도 싹 하죠. 자리를 비운 사이에 쓰레기들이 너무 많이 들이차서.” “네, 알겠습니다.” “또 중국이랑 일본 쪽의 감시 숫자를 더 늘리세요. 지금의 세 배 정도로. 당장은 서로 싸운다고 바쁘겠지만, 저희라는 공통의 적이 나타났으니 합심해서 덤빌 수도 있어요. 그걸 조심해야 돼요.” “예,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나연성의 모습에 정수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의 시선이 흘깃 제 발치의 오거득을 향했다.
“…이 아저씨도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아가씨께서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괜한 욕심을 부린 것이 문제죠.” 나연성의 입에서 ‘사장님’이 아닌, ‘아가씨’라는 호칭이 튀어나왔다.
지금이 아닌 과거에 정수아를 부르던 호칭이었다.
전대 사장인 할아버지가 살아있고, 그 후계자였던 정수아의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불리던 호칭.
꽤 오랜만에 들어본 ‘아가씨’라는 호칭에 정수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아저씨도 너무 닳고, 닳아서 찌들어 버린 거겠죠… 저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담담히 내뱉은 정수아가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런 그녀의 등을 나연성이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느릿하게 걸어 업무용 책상까지 다가간 그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여기도 청소가 필요하겠어요… 저거랑 같이 내다 버리세요. 이참에 싹 다 새로 구하게.” 흘깃 눈짓으로 오거득을 가리킨 정수아가 도로 되찾은 제 자리에 얌전히 몸을 앉혔다.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그저 되찾아야 할 것을 되찾았을 뿐이기에.
단지, 아주 조금 씁쓸할 뿐이다.
“…옛날에 먹었던 사탕이 참 달았는데.” 이제는 그 사탕을 먹어도 그리 달 것 같지 않았다.
홀로 남겨진 집무실에서 정수아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부서진 집무실의 문 사이로 꽤 오랜 시간 달콤한 향이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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